어떠한 이론이 패션과 만나면 왜 어떠한 형태, 즉 구조 속으로 들어가게 될까? 패션이 갖는 한계와 그것을 탈피할 방법은 무엇일까. 가상현실에서 마저도 원래의 의복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탈구조나 제도 바깥의 예술을 말하는 이론을 만나도 패션은 왜 의복의 형태에서 크게 달라질 수 없을까? 패션과 버내큘러에 대한 연구는 형태나 아이템 색과 같은 단편적인 것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자전적인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이 패션산업에서 나타나는 버내큘러에 대한 특징을 좀 더 유용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 패션에 나타나는 버내큘러적 특징은 '색동저고리, 팔각모반을 겹쳐 방패연을 띄우는 모양의 지붕과 처마선의 곡선적인 이미지를 차용하며, 녹의홍상의 문화를 기반으로 위아래 다른 색상의 옷을 선호한다.'라는 것보다는 '자크뮈스는 패션스쿨을 중퇴하고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영감을 받아 틀에 박히지 않는 패션쇼를 진행하는 브랜드다.'라는 것이 좀 더 확장 가능성이 느껴지지 않는가? 패션과 이론은 어떻게 접목시켜야 될까? 접근 방법에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예시가 틀린 것일 수도.
내가 무지했을 수도.
내가 감히.
내가 또 잘못을.
접근 방법에 대한 고민에 앞서,
나는 아르브뤼와 버내큘러를 단지 제도 바깥의 예술, 비제도적 예술로써 서술하고자 한다. 또한 여기에 나타나는 아웃사이더 예술가에 대한 동경과, 비제도적 예술가와 천재의 상관관계, 더하여 이에 대한 모방성까지 다루고 싶다. 버내큘러 디자인은 왜 버내큘러적이라는 형용사를 달고있는 디자인이 될 수밖에 없는지? 철학과 디자인의 접목에서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고찰한다. 명사를 동사로써 사용하고자 할 때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 철학을 디자인에 접목시키고자 할 때 어떻게 해야 디자인이 온전히 그 철학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까? 철학은 어쩔 수 없이 단순히 개념을 창조하기 위한 원칙일 뿐이어서 그것의 적용과 접목은 또 다른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걸까? 현재에는 '어떻게 접목시키느냐'가 또 다른 미학이 된다.
들뢰즈, 가타리는 '철학은 개념들을 창조하는 데 쓰이는 원칙이며, 개념은 구조화되지 않고 스스로 외부와 감응하며 변이를 되풀이하는 유기체일 수 있다. 즉 철학은 진행형으로 서술되는 '되기'의 문제다.'라고 했다. 더하여 들뢰즈는 삶의 권력에서 탈주하여 해방되어 있는 예술을 진정한 예술로 보며, 이것을 순수 예술이라고 했다. 아르브뤼는 기존 예술의 척도와 규범에서 벗어난다. 아르브뤼 작품은 '소수자-되기'의 흐름과 접속하여 저항함으로써 예술을 완성한다. 인간의 본능적 창작 욕구로 정의되는 아르브뤼는 예술의 범주와 본질 자체에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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